동네 이야기 · 4분 읽기
로마, 이탈리아
로마 EUR 지구
열리지 않은 박람회가 남긴 도시
EUR은 1942년 세계박람회를 위해 설계됐지만 전쟁으로 박람회는 열리지 않았다. 완공된 건물들은 그대로 남아 지금 로마 남부의 업무 지구로 사용된다.
이념적 목적으로 설계된 기하학적 도시 구조, 완공되지 않은 박람회의 역사, 그리고 그 건물들이 민주주의 시기의 업무 공간으로 전환된 과정이 EUR의 공간적 성격을 형성한다. 의도된 기념비성과 일상적 업무 기능의 공존이 이 장소를 로마 안의 이질적인 섬처럼 만든다.
무솔리니 정권이 1942년 박람회를 위해 기획한 지구. 박람회는 취소됐지만 건물들은 살아남았고, 전후 이탈리아는 이 공간을 철거하지 않고 업무지구로 전환했다. 로마의 다른 어느 곳과도 닮지 않은 기하학적 도시 구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동네가 생긴 배경
EUR은 'Esposizione Universale Roma'의 약자다. 1935년, 무솔리니 정부는 1942년 세계박람회를 로마에서 개최하고 그 부지를 영구적인 도시 지구로 남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현대적 건축 언어로 재해석한다는 구상 아래, 이탈리아 합리주의 건축가들이 설계를 맡았다. 고전적 비례를 유지하되 장식을 제거하고, 기하학적 형태와 석회석 외장으로 기념비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박람회는 열리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년 행사는 취소됐다. 일부 건물은 완성됐고 일부는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됐다.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구를 철거하지 않고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국가 기관과 민간 기업들이 입주하면서 업무 지구로 자리를 잡았다. 파시스트 체제가 기획한 공간이 민주주의 공화국의 업무 지구가 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장면
이 지구의 가장 유명한 건물은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à Italiana)다. 6층 구조에 아치형 개구부가 반복되는 순백색 대리석 건물로, '사각 콜로세움'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현재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펜디(Fendi)의 본사로 사용 중이다. 건물 외벽에는 파시스트 이념을 담은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탈리아는 이 건물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 그 자체가 이 나라가 자국 역사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선택이다.
EUR 중심부에는 인공 호수 라게토 델 EUR(Laghetto dell'EUR)이 있다. 직선과 대칭으로 설계된 도로와 광장, 그리고 호수가 조합된 이 지구의 구조는 전체 계획이 얼마나 철저히 설계됐는지를 보여준다. 현재 EUR은 지하철 B선으로 로마 도심과 연결돼 있으며, 대형 컨벤션 센터(La Nuvola)도 이 지구 안에 있다. 로마의 다른 지역이 수천 년의 역사를 겹겹이 쌓아온 곳이라면, EUR은 단일 이념이 단일 시기에 설계한 도시 공간의 드문 사례다.
걷다 보면 보이는 것
이념적 목적으로 설계된 기하학적 도시 구조, 완공되지 않은 박람회의 역사, 그리고 그 건물들이 민주주의 시기의 업무 공간으로 전환된 과정이 EUR의 공간적 성격을 형성한다. 의도된 기념비성과 일상적 업무 기능의 공존이 이 장소를 로마 안의 이질적인 섬처럼 만든다.
눈여겨볼 단서
-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의 아치 층수와 열 수를 직접 세어 보라. 기하학적 반복이 어떻게 기념비성을 만들어내는지 관찰할 수 있다.
- EUR 지구의 도로망을 걸으며 직선과 직각으로 구성된 가로 체계가 로마 구시가지의 불규칙한 도로와 얼마나 다른지 체감해 보라.
- 라게토 델 EUR 주변에서 건물들의 대칭 배치를 관찰하라. 이 호수는 장식이 아니라 지구 설계의 기하학적 중심으로 기능한다.
- 1930-40년대 원래 합리주의 건물들과 1960년대 이후 추가된 건물들의 외장 재료와 비례를 비교하면 이 지구가 시대별로 어떻게 채워졌는지 파악할 수 있다.
동네 노트
읽고 나면 현장에서 더 잘 보이는 단서들
박람회 취소 이후 보존된 건물들
1942년 박람회가 전쟁으로 취소됐지만 이미 완공된 건물들은 그대로 남았다. 전후 이탈리아 정부가 이 건물들을 철거하지 않고 업무용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한 것이 EUR의 현재 형태를 만들었다.
사각 콜로세움의 외벽 문구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외벽에는 이탈리아어로 파시스트 이념을 담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는 건국 이후 이 문구를 제거하지 않았으며, 이 건물은 현재 펜디 본사로 사용 중이다.
단일 계획안으로 설계된 도시 지구
EUR의 도로, 광장, 건물 배치는 단일 계획안에 따라 설계됐다. 직선 도로와 대칭 축선, 인공 호수를 포함하는 이 구조는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로마 구시가지와 대조적이다.
컨벤션 센터 La Nuvola
EUR 지구 내에 자리한 컨벤션 센터 La Nuvola(구름)는 건축가 마시밀리아노 푹사스(Massimiliano Fuksas)가 설계한 대형 복합 시설로, 1930년대 합리주의 건물들과 대비되는 현대 건축의 사례로 이 지구 안에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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